평생을 법전의 엄격함속에서 살아온 한 법관이 이제는 말을 아껴야 하는 자리에서 내려와 사람과 나무의 언어로 건네는 다정한 인사를 만났다. “악용하는 사람에게는 호의를 중단하십시오.”라는 단호한 문장을 출발점으로, 선생님이 말하는 호의는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근본적인 존중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가치임을 일깨워준다. 그런 호의는 결국 선순환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말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고뇌와 그럼에도 놓지 않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독만권서 행만리로의 달성률이 아직 20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선생님의 고백 앞에서, 나는 과연 1퍼센트라도 따라가고 있을까.. 하며 스스로 질문을 하게 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가 걸어온 길을 다시 걸을 때, 그 길 위에 가장 솔직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남아 있기를 바래보며..
“우리는 떠난 그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다가, 그 없이 살아야 하는 우리가 더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한 문장은 한기택 판사님의 죽음을 둘러싼 슬픔의 깊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막강한 권력을 지닌 판사였음에도 평생을 극도로 검소하게 살아왔다는 일화, 청렴함, 그리고 어떤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강직함에서 존경심이 느껴진다. 유능함과 독설을 무기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한기택 판사는 법이 가진 강력한 힘을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호의로 전환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정신적 스승이 걸어온 길을 좇아 판결하고, 사유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큰 책임이자, 동시에 감사한 일일까 생각해본다. 덧붙여, 한기택 판사님의 삶의 목표 중 하나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라 하셨고, 20년 결혼생활 동안 화를 내지 않으셨다는 말씀에서 미담을 넘어선 하나의 삶의 윤리가 느껴졌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의 태도였고, 내겐 경의로움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신 몫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 또한 등장하는데, 나는 그중 화를 내기 전 잠시 시간을 갖는 것과 유머로 감정을 승화하는 방식을 택하고 싶다. 나는 별일을 굳이 별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사소하게 생각하고, 사소하게 풀고 싶다. 혹여 지금 상황 판단을 못 하고 있다며 나를 다그친다 해도, 악한 감정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해결의 깊이 또한 그만큼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사건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단어로, 어떻게 더 예쁘게 표현할 것인지는 늘 나에게 남은 숙제이지만 말이다.판결문 뒤에 숨겨진 각기 다른 시간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려고 했던 분인 것 같다. 과로로 순직하실 만큼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었던 것도, 법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 했기에 판사님에게 쏟아부은 시간은 숫자에 불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상태가 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가 바빠서 시간이 부족하다 해도, 그가 무뚝뚝해서 내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해도, 내가 그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지혜를 가진다면 그 모든 시간의 장난은 나를 흔들 수 없어" 라는 생각을 했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어쩌면 한기택 판사님은 이 시를 통해 평점심을 배우셨을까? 누군가에게는 너무 빠르고, 누군가에게는 너무 느린 세상의 소란 속에서, 사랑이라는 단단한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려 하심은 아닐까.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 절망하기엔 이르다." 김장하 선생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책의 제목으로도 잘 알려진 이 말은 내 마음에 따뜻한 온도를 주었다. 선생님은 수천명의 학생에게 조건없이 장학금을 주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지마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호의는 수십 년 뒤 각계각층에서 선생님을 닮아 사회를 지탱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이 기적 같은 선순환을 보며 깨닫는다.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호의를 베풀 때, 세상은 비로소 그만큼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그러니 타인의 결핍이나 차가움 때문에 미리 비관하거나, 관계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타인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나부터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겠단 생각을 해본다. 사회는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직장인, 아이를 정성껏 키우는 부모 등 자기 몫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모여 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린다. 우리는 그 평범한 성실함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비로소 안도한다. 화려한 능력이나 날카로운 지성보다 더 위대한 것은, 결국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타인에게 곁을 내어주는 지탱하는 마음일 것이다.현실을 알면서도 냉소로 도망치지 않는 성숙은 가능할까? 라는 물음앞에 나는 세상을 알수록 계산적으로 변해가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도 지켜내는 것이 더 많아지는 나이를 살고 싶다. 내가 지켜야 할 신념, 사랑, 예의가 점점 더 두터워지는 삶을 말이다.
문형배 선생님은 책을 읽는 이유로 무지, 무경험, 무소신의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나 또한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나의 편파적인 시선이 고집이 되고, 그 고집이 시야를 좁게 만들까 두렵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다. 세상을 더 넓게 보고, 그 방향이 조금 더 올바르고 나은 선택으로 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특히 재판관님이 강조한 문학의 가치는 법조인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그는 법의 엄격한 형식 안에 문학적 공감이라는 내용물을 채워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법이 단순히 차가운 처벌의 도구를 넘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삶 약자, 소외된 자, 심지어 범죄자의 이면까지도 간접 체험하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좁은 세계관에 갇히지 않고,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호의의 출발점이 아닐까.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지만, 문학은 그 이상의 연민과 환대를 가르친다. 법이 미처 닿지 못하는 그늘진 곳을 문학적 상상력과 인간적인 호의로 채워야 한다는 재판관님의 말씀이 머리로만 알던 정의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문장으로 다가왔다. 법은 차갑지만,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따뜻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비단 법정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모든 현실에서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삶의 온도인 것 같다.
에피소드를 말하기 위해 나무를 빌려왔다고 말하는 선생님을 보니, 법조문으로만 말을 해야 하는 위치에서 얼마나 답답함을 느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로그의 글들이 1100개가 넘어가는 것.. 필요한 이유 또한 이해가 된다. 나무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의 신분이나 죄질을 따지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그늘을 내어줄 뿐. 나무는 비바람이 분다고 해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오히려 시련을 겪을수록 뿌리를 더 깊게 내린다. 나무 한 그루는 나약해 보일 수 있지만, 뿌리와 뿌리가 얽혀 숲을 이루면 거대한 태풍도 막아낸다. 그렇기에 나무를 좋아한다. 내가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중에서 성취감도 있지만, 나무가 주는 안정감도 있는 것 같다. 날씨가 조금 풀리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러 가야겠다. 소나무의 침묵속에서 말의 깊이를 얻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상대의 결핍을 향해 쏟아내고 싶은 수많은 말들을 잠시 접어두고, 그저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는 침묵의 호의를 연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세상은 종종 내게 뱀처럼 교활해지라고 속삭인다. 그 냉혹한 세상을 모른 채 비둘기처럼 순수하기만 한 것은 선이 아니라 무능이며, 결국 그 순수는 누군가에게 짓밟혀 냉소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생각해본다. 진정한 공력이란 세상을 몰라서 순수한 것이 아니라, 뱀처럼 영리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나의 선택만큼은 비둘기 같은 따뜻한 호의를 유지하는 것임을.. 타인의 날카로운 계산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나의 온도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단단한 성숙의 형태였다. 문형배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화려하게 이기는 필승에 목매기보다, 묵묵히 나를 지켜내며 지지 않는 불패의 판을 짜는 것이 결국 최후의 승자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이 문장 앞에서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삶의 태도를 바로 잡아본다. 이 책 속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고서와 지혜들이 담겨 있다. 깊이 있는 사유를 갈망하거나, 멀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법조인의 삶속에서 사람의 향기를 맡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다정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나아갈 길 앞에서 누군가가 먼저 걸어간 아름다운 이정표를 보고 싶어 책장을 펼쳤고, 삶의 대나무 마디 하나가 더 단단해진 것 같다.